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자신의 ‘일시적인 삶’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삶의 의지를 잃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그 앞에 닥치는 모든 일들이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수용소에서 저 수용소로 몇 년 동안 끌려다니다 보면 결국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양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만 살아남게 마련이다.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고 잔혹한 폭력을 일삼고 도둑질을 하는 건 물론, 심지어 친구까지 팔아넘겼다. 운이 아주 좋아서였든 아니면 기적이었든 살아 돌아 돌아온 우리들은 알고 있다. 우리 중에서 정말로 괜찮은 사람들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을… (p.26)
수용소에 있었던 사람들은 자기 경험을 글로 쓰거나 이야기할 때, 당시 가장 절망적이었던 것은 얼마나 오랫동안 수용소 생활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고 이구동성으로 얘기한다. 우리는 언제 석방되는지를 몰랐다. … 한 저명한 연구 전문 심리학자는 강제 수용소에서의 이런 삶을 ‘일시적인 삶 provisional existence’ 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지적했다.
‘finis’라는 라틴어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끝 혹은 완성을 의미하고, 다른 하나는 이루어야 할 목표를 의미한다. 자신의 ‘일시적인 삶’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사람은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를 세울 수가 없다. 그는 정상적인 삶을 누리는 사람과는 정반대로 미래를 대비한 삶을 포기한다. 따라서 내적인 삶의 구조 전체가 변하게 된다. (p.114)
사실 수용소에서도 긍정적인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분명히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것이 기회인 줄 모르고 그냥 지나쳐 버린다. 자신의 ‘일시적인 삶’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삶의 의지를 잃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그 앞에 닥치는 모든 일들이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진다.
… 수용소의 어려운 상황을 자기 정신력을 시험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는 대신 스스로의 삶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아무런 성과도 없는 그 어떤 것으로 경멸한다. 그들은 눈을 감고 과거 속에서 사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 사람에게 인생은 의미 없는 것이 된다.
평범하고 의욕 없는 사람들에게는 비스마르크의 이 말을 들려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인생이란 치과 의사 앞에 있는 것과 같다. 그 앞에 앉을 때마다 최악의 통증이 곧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다 보면 어느새 통증이 끝나 있는 것이다.
(p.117)
사람은 어느 정도 긴장 상태에 있을 때 정신적으로 건강하다. 그 긴장이란 이미 성취해 놓은 것과 앞으로 성취해야 할 것 사이의 긴장, 현재의 나와 앞으로 돼야 할 나 사이에 놓여 있는 간극 사이의 긴장이다. 이런 긴장은 인간에게 본래부터 있는 것이고, 정신적으로 잘 존재하기 위해서 필수불가결 한 것이다. (p.158)
로고테라피에서 책임감을 강조한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로고테라피의 행동 강령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인생을 두 번째로 살고 있는 것처럼 살아라. 그리고 지금 당신이 막 하려고 하는 행동이 첫 번째 인생에서 이미 그릇되게 했던 바로 그 행동이라고 생각하라.
(p.164)
그동안 써 놓았던 책의 원고를 빼앗긴 대신 나는 물려받은 그 외투에서 히브리 기도책에서 찢어 낸 종이 한 장을 발견했다. 그것은 유대교 기도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셰마 이스라엘>이었다. … 그로부터 얼마 후, 나는 곧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이런 가혹한 상황에서 내 관심은 대부분의 동료들과는 달랐다. 그들이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수용소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이 모든 시련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내가 갖고 있었던 의문은 이런 것이었다.
“과연 이 모든 시련, 옆에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이런 상황이 의미 있는 것일까? 왜냐하면 만약 그렇지 않다면 궁극적으로 여기서 살아남아야 할 의미가 없기 때문에. 탈출하느냐 마느냐와 같은 우연에 의해 그 의미가 좌우되는 삶이라면 그것은 전혀 살아갈 가치가 없는 삶이기 때문에.”
(p.172)
인간은 여러 개의 사물 속에 섞여 있는 또 다른 사물이 아니다. 사물들은 각자가 서로를 규정하는 관계에 있지만 인간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규정한다. 타고난 자질과 환경이라는 제한된 조건 안에서 인간이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판단에 달려 있다.
나는 살아 있는 인간 실험실이자 시험장이었던 강제 수용소에서 어떤 사람들이 성자처럼 행동 할 때, 또 다른 사람들은 돼지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았다. 사람은 내면에 두 개의 잠재력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그중 어떤 것을 취하느냐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본인의 의지에 달려 있다.
우리 세대는 실체를 경험한 세대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정말로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됐기 때문이다. 인간은 아우슈비츠 가스실을 만든 존재이자 또한 의연하게 가스실로 들어가면서 입으로 주기도문이나 <셰마 이스라엘>을 외울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p.194)
그러나 모든 위대한 것은 그것을 발견하는 것만큼이나 실현시키는 것도 힘들다. 스피노자 <윤리학> 마지막 문장이다. (p.220)
도움이 되었나요?